2008/10/16 23:35





모든 길은 진리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리는 길을 갖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점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진리는 살아 있다. 죽은 것은 그것이 정적(靜的)이기 때문에 길을 갖고 있지만,
진리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서 쉴 곳이 없다.
어떤 절이나 교회에도 없으며 어느 종교나 선생, 철학자 그 누구도
당신을 진리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되면,
 당신은 이 살아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Posted by 어흥:)
2008/10/15 23:39






개인의 역사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전에는 제 3자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된다.
유년을 극복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내레이터 노릇을 해온 부모의 그릇된 이야기를 교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에 대항하는 투쟁은 유년에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가 누군가라는 문제의 결정을 놓고 선전전이 벌어진다. 현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수많은 이해 집단이 투쟁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계속 왜곡되어 있다. 적의 질투 때문일 수도 있고, 무관심한 사람의 나태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맹목성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도 엄청난 선입관이 따른다. 별 근거도 없이, 진정한 이해에 요구되는 중립적 자세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 어떤사람이 천재 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결정을 내린다. 기분 좋은 왜곡이지만, 어쨌든 왜곡은 왜곡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유원지의 요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아주 작은 사람이 갑자기 3미터 길이로 늘어나기도 하고, 마른 여자가 뚱뚱해지기도 하고, 뚱뚱한 사람이 날씬해지기도 하고, 기린 같은 목이나 코끼리 같은 발이 생기기도 하고, 나쁜 인물이 되기도 하고 성자가 되기도 하고, 뇌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길고 아름다운 다리가 생기기도 하고 다리가 없어지기도 한다.

나르시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촉촉한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약간은 실망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우리가운데 어느부분은 절단당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치명상이던 아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中>

Posted by 어흥:)